진공 속에서: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장소를 기록하기
“장소를 기록하는 행위는 사진을 통해서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곧이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수 있다. “그 장소는 어떻게 기록될 대상이 되었을까”. 후자를 통해서 우리는 전자에 내포된 본질적인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다. 바로 장소를 기록하려면 그곳과 관련된 어떤 가치가 전제된다는 점이다. 그 가치란 개인의 추억일 수도 있고, 그곳의 사회적 또는 역사적 배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가치는 사진에 금방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진 표면을 통해서 개인의 기억이나 사회 역사상을 끄집어내기 힘들다. 이와 달리 사진은 기술적 측면이나 피사체에 시각적인 가치가 주어진다. 우리는 그 사진이 잘 나왔고 피사체로 포착된 길거리와 그림자의 대비에 아름다움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다고 장소의 기록은 촬영의 기술이나 피사체의 심미적 기준만 가지고 판단되지 않는다. 두 가치가 사진 표면에 드러난다면, 추억이나 사회와 역사적 가치는 표면 아닌 배후에 담기는 가치로서 사진에 주어진다.
피사체나 촬영 기술은 장소를 기록하는 행위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 배후에 계속적인 시공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사진을 살펴볼 때에 비로소 장소의 기록에 가치가 주어진다. 장소를 기록하는 행위는 지나간 시공간을 박제하는 가치를 사진에 사후적으로 제공한다. 이 가치는 사진 표면에 가시화되기 힘들다. 구도나 피사체에서 간직되는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달리, 장소의 기록물은 배후에 물러선 시공간의 흐름에 뒷받침된다. 바꿔 말해 가치 판단을 시공간의 흐름이 떠맡도록 보내놓는다. ‘그때 당시’, ‘이곳’이라 불린 시공간은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직면할 어려움은 기록된 공간을 현시점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유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과 사진 속 이곳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근본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지금 이곳이 사진에 기록된 장소인지 아닌지, 사진으로 박제된 증거를 현재 시점에 대응시키는 일은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튜나리의 전시 «M.P.A»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M.P.A>은 사진과 오브제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작가는 직접 현지를 찾아가서 건축물을 파노라마 뷰로 사진 촬영한 뒤, 출력한 사진을 조합하여 오브제로 만들어 유리돔 안에 보관하였다. 한편 오브제는 재개발 현장에서 가지고 온 부스러기나 채집한 흙이나 시멘트를 에폭시로 코팅하였다. 보관된 사진과 코팅된 부스러기가 어우러진 이 작품에서 두 매체는 공통적으로 과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남아 있던 건축물의 기록과 철거된 후 파편이 된 부스러기 둘 다, <M.P.A>에서 과거를 보존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데 작품에서 장소의 기록은 촬영 당시와 철거 후의 시선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번 작업은 오히려 장소의 기록이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정박되지 못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유리돔 내부에 설치된 사진에 등장하는 시각적인 이미지와 그 지역에서 가지고 온 부스러기는 작품에서 시공간을 바로 포착하지 못한다.
작가는 장소를 기록하는 촬영자의 시선이 아니라, 오히려 장소의 기록이 시공간 흐름에서 위치시키기 어려운 지점을 보여준다. 이는 작품 제목과 전시 제목의 ‘M.P.A’, 바로 기억(Memory), 보존(Preservation), 그리고 축적(Accumulation)의 약자에도 반영되어 있다. 기억과 보존, 그리고 축적의 관계는 장소의 기록에서 제각기 대응 및 연결하기 어렵고 분절되기 쉽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자명한 기록으로 판단되는 매체이지만, 이는 오로지 상(像) 즉 시각적 이미지의 차원에서만 유효하다. 상의 기록은 세 키워드 중에서 보존에 해당하는데, 이때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려면 기억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꿔 말해 당사자의 진술 또는 기술 없이 기억은 시각적으로 반영되기 힘들다. 이처럼 연결되지 않은 채 분절된 관계는 축적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축적이란 바로 시공간적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적되는 양상을 가리킨다. 그의 작품에서 유리돔에 보관된 사진과 코팅된 부스러기는 기억과 보존이 대상과 대응하지 못해 축적된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관람객은 그가 유리돔에 보관하고 코팅한 대상에 가치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무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맹목적인 관심이다. 전자는 장소의 기록에 “이게 그래서 왜 중요한데?”라고 가치의 부재를 물어보고 후자는 감정이입 하면서 그 대상을 아껴야 하는 보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M.P.A>는 두 가지 태도를 모두 거부한다. 촬영되고 유리돔으로 보관된 장소와 코팅된 부스러기는 무관심과 지나친 관심 사이에 놓이게 된다. 작품은 과거에서 현재로 떠내려올 수밖에 없지만, 정작 어디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현재-그때 그곳(과거)의 단절에 우리의 시선을 돌려준다. 우리는 그때 그곳을 지금 이곳과 동일시하기 어렵다. 기억과 보존, 그리고 축적이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못할 때, 장소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 자리를 점유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그 장소를 아예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내릴 수 없다. 그런데도 보물로 아끼려면, 기억이나 역사적 흐름을 알아야 한다. 보는 사람은 무가치와 가치를 매기는 자리에 아직 서지 못한다―오히려 가치 있는 곳‘일지도 모르는’ 관찰자의 태도로 작품을 보게 된다.
그곳은 사실 어디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부스러기가 어떤 역사를 지니고 촬영한 풍경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지 우리는 알아볼 수 없다. 유리돔 내부와 코팅으로 보관된 장소의 기록은 박물관의 소장품과 달리, 그 장소에 아직 가치가 주어지지 않았다. 박제된 장소(의 기록)는 이번 전시에서 시공간의 진공 상태로 보존된다. 이 보존된 ‘순간’은 사실 배후에 시공간의 흐름을 깔아놓는다. 언제 떠밀리거나 의미 부여될지 모르는 무방향적인 순간의 지표로서, 작가는 사진과 부스러기를 채집하고 전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사진 촬영자보다 장소의 수집가에 더 가깝다. 작품은 장소를 도래하지 않은 시공간으로 향하는 정지된 순간으로써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시기의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이 될 수 있기를 (아직은) 기다린다. 도래하지 않은 시공간 속에서 사진의 건축물과 코팅된 부스러기는 가치를 기다린다. <M.P.A>는 대상에 시각적 가치가 주어진 볼거리나 박물관의 역사화된 유물과 달리, 가치가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무시공간 속에 장소를 포착한다.
콘노 유키